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쿨하게 사는 것, 마지막에 보니 쿨하지 않다

· 댓글개 · 라라윈

라라윈 일상 이야기 : 남에게 피해주지 않는 개인주의, 쿨한 여자 할머니의 마지막... 

지난 주 갑작스럽게 할머니가 돌아가셨습니다. 모든 죽음은 갑작스럽지만... 특히 할머니의 죽음은 너무나 갑작스러운 일이었습니다. 아프시다가 돌아가신 것이 아니라, 워낙 건강하고 기운도 세신 분이 갑자기 돌아가셨거든요.. 치매로 입원해 계시긴 했지만, 너무 건강하셔서 병원에서도 힘들어 할 지경이었습니다. 너무 잘 움직이셔서 8층의 병원부터 계단으로 내려가셔서 탈출을 시도하시기도 하고, 식욕도 너무 좋으셔서 아주 잘 드시고, 참 건강하셨어요. 그런데 열이 좀 나신다고 전화가 오고, 몇 시간도 지나지 않아 갑자기 돌아가셨다는 연락이 왔습니다. 마지막까지 할머니 다운 쿨한 마지막이었다고 해야 될까요...

할머니는 여든 다섯이나 되셨지만, 요즘의 쿨한 여자, 딱 그런 분이셨습니다.
착하고 좋은 분이셨고, 남에게 피해주지 않는 개인주의셨어요. 남에게 피해주지도 않으셨고, 남 일에 크게 신경쓰지도 않으셨고요. 가족 때문에 희생할 것 없이 자신의 삶을 멋지게 꾸미기도 하셨습니다.
제가 어릴 적이었는데, 식구들에게 무슨 일인가 있어서 할머니가 오시면 저희 집으로 모셔달라며 부탁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 당시는 결혼만 하면 아주머니들은 머리를 짧게 자르고 아줌마 파마를 하고 잘 꾸미지도 않던 분위기 였습니다. 할머니들은 더욱 더 할머니스럽던 때고요.
그러니 동네분들은 당연히 머리는 하얗고, 한복같은 것을 입은 꼬부랑 할머니가 오시리라 기대하고 있으셨나 봅니다. 그런데 왠 키 큰 중년 여자가 또각또각 하이힐에 밤색 슈트를 촥 차려입고 나타나 저희 집을 찾더랍니다. 네. 그 분이 저희 할머니였어요.
 
할머니는 아빠가 어릴 적부터 일을 하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인지 신여성 같은 느낌이었어요. 제가 어릴 적에는 지금도 비싸지만 그 때도 참 비쌌던 피아노를 턱하니 사주신 것이 할머니였고요. 불과 몇 년 전, 대학원에 다시 들어간 것을 아시고는 제 등록금 한 번 내주고 싶다고 등록금을 주시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참 쿨하고 멋지게 사시다 간 것 같이 들릴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게 다에요.
할머니와 같이 한 것이 없다보니, 추억이 없어요. 할머니와 애틋하거나, 좋거나, 나쁜 일이 없습니다.
저희 할머니인데도... 나이 먹어서 만난 비지니스 관계의 사람과 별 다를 바가 없는 사이인 겁니다. ㅠ_ㅠ
집에도 식구들에게도 참 쿨하셨던 거지요.

사실 할머니는 큰 집의 맏며느리 입니다. 저희 집은 제사가 징글징글하게 많아요. 
그러나 할머니는 일을 하겠다며 나가셔서 그런 의무에서 벗어나 사셨습니다. 제 나이가 서른이 넘도록 제사며 온갖 집안 일은 온전히 엄마 차지였어요.
집안에 초상이 났다고 해서 할머니가 가시는 일도 없었고, 누가 결혼을 한다고 해서 할머니가 가시지도 않았습니다. 이런 할머니 때문이었을까요. 아빠는 가족이 세상 무엇보다 소중한 분 입니다.
아빠가 어렸을 때부터 곁에 안 계셨던 할머니 때문인지 저희 식구들은 늘 아침 저녁을 함께 먹었어요. 아빠가 칼퇴근 하시면 식구들이 모여서 저녁 같이 먹고, 같이 놀아주시고, 숙제 한거 봐 달라고 하면 잘 했다고 칭찬해 주시고... 그랬습니다.
아빠가 외로우셔서 였는지 집안 일이라면 어떤 상황에서도 발벗고 나셔서서 다 챙기셨어요. 집안 일 뿐만이 아니라, 이웃의 일에도 그러셔서.. 딸인 제 입장에서는 때로 답답하기도 했습니다. 아빠가 그런다고 누가 알아주는 것도 아닌데 때로 피해도 많이 보시면서 왜 그렇게까지 사람들을 챙기는지 이해할 수 없을 때도 많았어요.

그런데 할머니의 장례식장에서야 깨달았습니다.
할머니는 마지막까지 자손들에게 병간호 받을 것도 없이, 잠깐 열이 좀 난다고 하더니 돌아가셨습니다. 마지막까지 쿨하다면 쿨하게 가셨는데, 이렇게 평생을 쿨하게 사시다 쿨하게 가시고 보니... 남은 사람들의 마음도 참 쿨해집니다.
할머니와 끈적끈적한 무언가가 있던 사람이 없다보니 오열하는 사람도 없고, 장례식장의 분위기도 쿨하기 이를데 없었습니다. 저희 엄마만 왜 우는지 모르게 계속 우시고, 다른 사람들은 그저 멍했어요. 할머니를 추억하고 싶어도... 할머니와 함께 한 시간도 사건도 없으니... 갑작스러운 이 상황이 당황스럽고 멍할 뿐이었습니다.
할머니가 그립고 서운해서, 제가 잘못한것이 죄스러워서 우는 것이 아니라, 할머니가 외로워보여서.. 마지막까지 너무 외로워 보여 안쓰러워 눈물이 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가 분명해졌습니다.
아빠 엄마가 가족 친지들 이웃들 일에 그토록 마음쓰고 돕고 애쓰시더니만... 비가 억수같이 오던 그 날에도 참 많은 분들이 오셨습니다. 새벽부터 오셔서 다음날 할머니의 마지막까지 함께 해 주신 분들이 많았어요...
그러나 저나 동생은 귀찮은 일은 피해가면서 쿨하게 살아서 인지, 비가 억수같이 오는 귀찮은 상황에서 와주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장례식장에서 슬프다고 페이스북 하고 있는 것을 보면서 그 상황에서도 "나 이렇게 슬픔" "이런 감성이 있는 사람임" 이라며 허세 부리는 것인가 했었는데, 제가 겪고 보니 왜 그러는지도 알았습니다... 현실에서 사람이 없으니 페이스북에서라도 위로 받고 싶어서 그러는 것이었습니다. 힘내라는 답글 한 마디 한 마디에 너무나 큰 위로를 받았습니다. ㅠ_ㅠ


남에게 바라는 것이 없으니, 피해 안 주고 살면 되는 거 아니냐고...
그냥 내 앞가림하고 잘 살면 됐지, 자기 앞가림도 잘 못하는 주제에 남 챙기는게 바보라고..

그러나, 누가 정말 바보인지는 모르겠습니다.
할머니가 저에게 이렇게 살지 말라고 가르침을 주고 가셨나 봅니다...
쿨(약간 서늘)하게 사는 것이 진짜 쿨한(멋진) 것은 아니었어요.



2012/12/23 - 솔로탈출 절대로 포기하면 안되는 이유

저는 이제 할머니 할아버지가 다 돌아가셨네요...
향후 몇 십 년 간 이제 상복은 안 입었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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