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라윈 생각거리 : 안될거 뻔히 알면서 5%를 지지하는 이유
저는 할머니 장례식장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 날 저녁 각자의 지지자에 따라 어깨춤을 추는 친척도 있고, 가뜩이나 슬픈데 한국의 미래까지 걱정된다며 한숨을 푹푹 내쉬는 친척도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 오랜만에 만난 사촌오빠는 노동운동을 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뭘 잘 모르는 저는 그거 진보 어쩌구 하는 사람들 아닌가 하는 선입견이 있어, 그러면 2번을 찍었을거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돌아온 대답은 뜻밖이었습니다.
"만약 투표를 하러 갔다면 나는 7번 김순자 후보를 찍었을거야."
?????????
김순자 후보라고요???????
제 주변에서 유일하게 김순자 후보를 찍겠다는 사람이었습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제 평생 처음으로 만난, 유력후보가 아닌 사람을 찍겠다고 말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재미삼아 허경영 후보를 찍겠다거나, 3번 후보 정도까지는 찍겠다는 사람을 봤습니다. 그러나 무소속의 청소아줌마 후보를 지지한다는 사람은 사촌오빠가 처음이었습니다.
보통 대통령 선거나 국회의원 선거를 보면 '유력주자' 라고 하는 두세명이 있고, 나머지 사람들은 들러리가 됩니다. 선거 한 번 출마하려면 돈도 많이 들고, 시간이나 노력도 상당하다고 하는데, 당선이 안 될거 알면서 왜 나오는지 늘 궁금했습니다. 혹자의 말에 따르면 부자들의 경우 주위에서 출마해서 정치 권력까지 갖으라면서 꼬드겨서 선거 출마하게 한 뒤에 유세비용을 사기친다는 카더라 소문도 있었고, 자신의 욕심 때문에 주위사람들은 안될거 아는데 당사자만 몰라서 나오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지난 대선에서도 다른 후보의 경우 TV에 출연해서 유명세가 있고, 돈도 있으니 권력 욕심 때문에 나오나보다 하는 생각을 했는데 김순자 후보는 청소 아주머니라서 돈도 없으신 것 같고 빽도 없으신 것 같은데 대체 왜 생고생하면서 대통령 후보에 나오는지 의아했습니다. 제 주위에서는 저 사람 찍겠다는 사람이 단 한명도 없는데 왜 나왔을까 정말로 궁금했거든요. 그런데 저희 사촌오빠가 찍겠다네요.
제가 더 충격에 빠졌던 것은 이 오빠가 보통 인물이 아니라, 정말 머리가 비상한 수재였기 때문입니다. 학창시절 전교 1등의 성적으로 SKY를 나왔을 뿐 아니라, 이 오빠는 초등학교 때 부터 남달랐습니다. 너무 똑똑해서 재수없을 정도였습니다.
오빠가 초등학교 5학년 무렵인가 친척들이 모인 자리에서 죄다 호를 지어주고 있었습니다. 한자로요.
죽음 (竹陰) : 음지의 대나무처럼 곧게 자란다는 뜻
송장 (松長) : 소나무처럼 푸르고 오래 살라는 뜻
이런 식으로 국어 발음으로는 흉한 뜻인데, 한자는 좋게 붙이는 말장난을 쳤습니다. 저한테는 만득이라고 만가지를 얻는다는 뜻이라며 호를 지어줘서 짜증냈던 기억이 납니다. 초딩때부터 재수없게 똑똑하고 논리적이어서, 이 오빠가 자라서 우병우 검사 싸대기 칠 정도로 도도한 법조인이 될 줄 알았습니다. 그랬던 오빠가 사회적 부귀영화 내려놓고 노동운동 한다는 것도 의아했는데, 게다가 대통령 후보로는 김순자 후보라니요.
저도 모르게 솔직한 궁금증이 튀어 나와버렸습니다.
"왜~? 안될거 뻔히 알면서, 되지도 않을 사람을 왜 뽑아, 오빠?"
"안 될 건 알아. 당선이 될거라고 생각해서 지지하는 것이 아니라, 목소리를 내는거지. 계속해서. 적은 숫자라도 노동자를 지지하는 사람이 있다고 보여주는거야. 지난 대선에 (노동자를 지지하는 후보의 지지율?) 5%였는데 이번에는 7%로 늘었어. 그 자체로도 의미가 있는거야."
뒤의 퍼센트 이야기는 오빠가 친절히 설명해 줬으나 귀에 들어오지 않았고, 앞의 이야기가 강하게 남았습니다.
안될거 안다. 될거라고 생각해서 하는게 아니라 계속 지지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4년여가 지난 지금도 안될거 뻔히 알면서, 계란으로 바위 치는 느낌이 드는 일을 마주하게 되면 오빠의 말이 떠오릅니다.
오빠의 해탈한 듯한 평온하고 좋아 보이는 모습도 제게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엘리트 코스를 밟을 것 같던 때 보다 정확히 뭘 하는지는 모르겠으나 현재의 오빠가 더 좋아보였기 때문입니다. 예전에는 사촌오빠가 똑똑하니 자랑스럽기는 했으나 차갑고 먼 사람이었는데, 요즘은 더없이 따뜻하고 든든한 오빠가 되어 더 좋기도 했고요. 아무튼 오빠는 쉬운길을 가는 것 같진 않아 보였으나, 행복해 보였습니다.
아마도 오빠와의 일이 아니었다면 저는 김순자 후보에 대해 까맣게 잊었을 겁니다. 실은 지금도 박근혜 문재인 이정희 후보외에 김순자 후보만 기억할 뿐 다른 사람들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김순자 후보가 7번이었으니 중간에 3명 더 있었을텐데요
문득 궁금해져서 지난 대선에서 김순자 후보의 득표율을 찾아봤습니다.
4번째로 많은 지지를 받았고, 약 5만명이 지지를 했나 봅니다. 전체의 %를 보니 0.2%입니다. 오빠가 5%, 7% 이야기를 했던 것 같은데 지지율에 대한 이야기는 아니었나 봅니다. 5%이건 0.2%이건 간에 통계적으로 대통령이 될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것은 차이가 없는 것 같습니다.
오빠 덕분에 드디어 안될거 뻔히 알면서 지지하는 심리를 조금 알 수 있었습니다. 다수가 지지하는 유력 후보를 지지하는 심리에 대한 연구는 상당히 많이 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은 패배하고 싶지 않아하고 실패를 싫어하기 때문에 실패하지 않을 것 같은 사람 쪽으로 쉽게 기운다는 것, 다수의 힘이 있기 때문에 다수의 편에 서서 권력감을 느끼고 싶어한다는 것 등등의 설명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전 여론조사 결과가 매우 중요한 것이 뚜렷한 신념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들의 경우 여론조사에서 1위하는 후보를 뽑는 확률이 매우 높다고 합니다.
그러나 안될거 뻔히 알면서 뽑는 것은 왜냐 라는 것은 답을 찾기 어려웠거든요. 모든 사람이 사촌오빠처럼 안될거 뻔히 알더라도 꿋꿋하게 목소리를 내려고 한 것은 아니겠지만, 결과 보다 과정에 의미를 두는 사람도 분명 있나 봅니다.
요즘 사촌오빠 말이 자꾸 떠오르는 이유는 종종 불안감이 엄습하고 답답해서 입니다.
누군가 "촛불 하나 더 들면 뭐하냐, 광화문에 한 명 더 나간다고 달라질거 있느냐"라고 말할때는 "가만히 있는다고 달라지는 것도 아니잖아. 한 명이라도 더 목소리를 낸다고 보여줘야지." 라고 대답은 하지만, 속으로는 답답합니다. 제가 할 수 있는 것이 고작 주말에 광화문 나가는거 말고는 없다는 것에 무력감이 들기도 하고, 큰 죄를 짓고도 빨리 단죄할 수 없는 시스템에 화도 나고, 대체 어디까지 썩어있는지 누구랑 싸우고 있는지 실체를 모르겠어서 두렵기도 하고요. 고작 0.2% 사람들이 지지하는 소수 후보, 소수 의견이 아니라 국민의 95%인 다수의 편에 있으면서도 마음이 이렇네요.
저는 결과적으로 실패하면 과정도 의미없다고 폄하해버리는 결과주의에 너무 찌들어 있나 봅니다....... 되든 안되든 계속 해보고 가고 있는 것에 의의를 두기에는 저는 아직 많은 수양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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