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라윈 생각거리 : 안심은 커녕 더 불안한 여성 안심 귀갓길
지금 거주지로 이사 올 때, 싸고 주차가 가능한 괜찮은 집을 찾았습니다. 차를 가지고 다니니 대중교통 편의성은 고려하지 않았고, 대중교통 편의성이 떨어질수록 집세가 쌌습니다. 그래서 콰트로 역세권 집을 구하게 되었습니다. 주변에 지하철역만 4곳이 있는데, 역 4개가 다 멉니다. 전부 1km 이상 떨어져 있어서 꽤 걸어야 합니다. 마을버스가 있지만 마을버스 배차간격이 길어서, 기다리느니 걸어가는 것이 빠를 때가 많았습니다. 지름길로 가면 10여분 정도 걸으면 됩니다. 지름길은 골목 사이 사이를 가로지르는 길인데, 언제부터인가 그곳에 '여성 안심 귀갓길'이라는 문구가 쓰여지기 시작했습니다.
길바닥에 대문짝만하게 '여성안심귀갓길'이라고 쓰여 있으니 시선은 끄는데, 이 표지를 보니 갑자기 불안해졌습니다.
아무 이유없이 이런 것을 썼을 리는 없고, 이 길에서 범죄가 있었거나 범죄 발생 가능성이 높으니 이런 것까지 했을거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이 글씨가 쓰여진 곳이 여러 곳이 있었는데, 그냥 글씨만 덩그러니 쓰여진 곳도 있고, 옆에 다목적 방범 CCTV 카메라가 설치되어 있는 곳도 있습니다. 이 글씨를 쓰면서 설치한 것은 아니고, 원래 다목적 방범 CCTV 카메라가 있었습니다.
'골목에 방범 카메라를 설치하더니, 여성안심귀갓길이라고 대문짝만하게 써놓기까지 하네? 정말 이 근처에서 무슨 일 있었던거 아냐?'
하는 불안감이 커졌습니다.
저만 이런 것이 아닌지 '여성안심 귀갓길'이라는 글씨를 본 반응은 비슷했습니다.
"이 길은 여자들 다니면 안 되겠네.. 우리 와이프한테 이런데로 다니지 말라고 해야지..."
"집값 떨어지겠네. 정부에서 이런데다 돈 쓴단 이유는 위험하다는 거지. 여기서 범죄가 많이 일어났으니까 이런걸 했겠지. 집 구할때 길에 이런거 써 있으면 거기는 구하면 안 되겠네."
라는 것이었습니다.
가뜩이나 논란이 되는 여혐 문제가 불거지기도 했습니다.
"여성 안심 귀갓길? 여자만 세금내? 솔까 세금은 남자가 더 낼텐데 왜 죄다 여성만이야? 지하철 여성칸, 여성 안심 택배, 여성 주차장, 이제는 길바닥까지 여성 전용이야 뭐야?"
라면서 불편한 반응을 보였습니다.
여자인 제가 느끼기에도, '여성안심 귀갓길'이라고 써 놓는다고 안심이 되는 것도 아닌데, 괜히 여자를 위한답시고 세금낭비 한 것 같아 보이고, 여러모로 실효성이 의심스럽습니다.
컴컴한 골목길에서 이 글씨를 보면 갑자기 이 길이 위험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더 무서워요... ㅠㅠ
아무짝에 쓸모없는 길바닥 '안심 귀갓길' 글씨를 써놓고 얼마 지나자, 전봇대에 112신고 위치번호라는 것이 생겼습니다.
산에 갔을 때는 위치번호가 곳곳에 달려 있는 것이 크게 안심이 되었습니다. 행여 발목이라도 접질리거나 도움이 필요할 때, 전화해서 위치번호만 말하면 저를 구하러 와 줄 것 같아 든든했어요.
그러나 골목길에서 112신고 위치번호 표지판을 보자, 산에서 느낀 든든함과 달리 불안한 상상이 덮쳐왔습니다.
'만약에 내가 골목길에서 치한을 만나면, 저 번호로 신고할 틈이 있기는 할까?
아니, 신고를 했다고 쳐. 요즘은 112 문자 신고도 되니까. 출동하는데 5~10분 정도 걸릴텐데 이미 그 사이면 뭔 일을 당했을 것 같은데? 차라리 주택가니까 불났다고 소리지르면 창문 열어보는 사람 한 명이라도 있지 않을까? 요즘엔 밖에서 소리질러도 사람들이 창문도 안 열어보거나 베란다에서 구경만 하지 나서지 않는다는 기사 본거 같은데.... 가랑이를 빵 차고 큰길로 미친듯이 뛰어나가는게 제일 효과적인거 아닐까?'
같은 불길한 상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습니다. 산의 경우 치한에게 피해를 입어 신고하는 상황보다, 혼자 있는데 다치거나 길을 잃는 경우를 상상했기 때문에 위치번호가 곳곳에 안내되어 있는 것이 안심이 되었는데, 골목길에서 여자가 불안해서 경찰에 신고할 일이라면 '사람'이 덮치는 것 외에는 상상이 되질 않아서 였습니다.
잘 다니던 길에 '여성안심 귀갓길' 표시가 생김으로써 오히려 불안해지는 아이러니가 발생한 것 입니다.
볼 때마다 안심은 커녕 불안감과 불편함을 주는 여성안심귀갓길 입니다.
- 지하철 불편신고, 지하철 잡상인 구걸 스트레스 그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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