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라윈 일상 이야기 : 교통사고 합의금을 대신 내준 낯선 아저씨
누군가 차 옆면을 쫘악 긁어놨습니다. ㅠㅠ
왜 주차장에 멀쩡히 주차된 차에 테러를 하고 가는 것인지...
그만큼 불특정한 아무에게나, 아무 차에나 화풀이라도 하고 싶을만큼 세상살기 힘든 사람이 많은지도 모르겠습니다.
차를 가지고 다니노라면, 편리하고 좋은 점도 많은데, 이런 이유없는 테러를 당하면 확 화가 납니다. 이런 날 뿐 아니라 당황스러운 교통사고를 겪는 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차를 사고 이틀인가 삼일 째 되던 초보운전자 시절이었습니다.
집에 가기 위해 피맛골 근처를 지나는데, 갑자기 피맛골 골목에서 왠 여자가 길로 뛰쳐나오는 것이었습니다. 보아하니 이미 술이 떡이 되어 있어서 차가 오거나 말거나 개의치 않고 차도로 돌진하고 있었습니다.
이제 운전한지 2~3일된 생초보 운전 시절이라, 너무나 당황을 했습니다. 직진밖에 못하던 시절이었으니까요. ㅜㅜ
그대로 가자니 여자를 치겠고, 피하자니 다른 차를 칠 것 같은데, 사고를 피하는 것이 인간의 본능인지 우선은 하얀 옷을 입고 뛰어나오는 정말 귀신보다 더 무서웠던 술 취한 여자를 피해 핸들을 돌렸습니다.
그리고, 직진하던 택시의 옆구리를 들이받았습니다. ㅜㅜ
2~3일된 초보운전자이니 당황해서 어찌할 바를 몰랐죠.
술 취해서 도로로 달려든 여자가 너무 원망스러웠지만, 어쨌거나 사고를 낸 것은 저이고, 책임도 제가 져야 되는 상황입니다. 내려서 보니, 정말 택시 뒷문이 쑤욱 들어가 있었습니다.
초보운전 첫 날 택시와 스친 적이 있었는데, 아무 흔적도 없는데 (사실 스쳤는지 아닌지도 지금도 의심스럽습니다.) 합의금을 내놓으라더니 지갑에 3만원 있다고 보여드리니 3만원을 모두 뺏어서는 가버렸던 일이 있었습니다.
차에 흔적도 없어도 지갑을 몽창 털어가는데, 뒷문이 움푹 들어갔으니, 이건 대박 사건이라는 생각에 식은땀이 흘렀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기사 아저씨는 뒷목부터 잡고 나오시면서 충격때문에 곧 돌아가시기라도 할 것 같았습니다.
벌써 9년 전이니 갓 스무살 넘은 운전시작한지 3일 된 생초보 여자아이가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난감한 상황이었습니다. 옆에 타 있던 친구도 똑같이 갓 스무살 넘은 여자아이니 둘이 오들오들 떨고 있는 것과, 내려서 무한 반복 사죄 말고는 할 수 있는 일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싹싹 빌어도 아저씨는 호락호락 용서해 주실 분위기가 아니었습니다.
종로 2가 한복판이니 주위에 사람이 많았어도 멀찍이서 뒷목잡고 계시는 택시 아저씨와 머리가 땅에 닿도록 사과하고 있는 여자를 구경할 뿐이었습니다. 그러자 택시 아저씨는 점점 언성이 높아지시며, 차 여기도 이상하고 저기도 이상하며, 몸도 엑스레이를 찍어보고, 뭣도 하고... 아주 중환자가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그 때 한 남자분이 나타났습니다.
손님을 태우기 위해 쭈욱 줄 서 있던 택시의 기사님이셨던 것 같은데, 그 분이 오더니
"상황을 보니 이 아가씨가 미숙해서 실수를 한거 같은데, 이거 10만원에 쇼부칩시다."
라며 저 대신 협상을 시작하시는 것이었습니다.
나중에 교통사고를 여러번 경험하면서, 준 보험전문가처럼 알게 되었는데, 뒷문짝이 움푹 들어갈정도로 제대로 받힌 사건은 100% 입원 가능하며, 10만원이 아니라 훨씬 많은 합의금을 받을 수 있는 사고였습니다.
그러니 택시 아저씨가 가만히 있을리 없습니다. 노발대발 난리가 나셨죠.
"당신 뭔데 남의 일에 끼어들고 난리야? 이 여자를 알어?"
그러자 그 젊은 택시기사 아저씨는
"내 동생이요. 왜요?"
라며 나서시더니, 마구 몰아붙여 전투를 해 주었습니다.
젊은 아저씨가 이깟거 별거 아닌데 합의하자며 덤벼드니, 머리가 하이얗던 택시 아저씨는 아까와는 태도가 달라져서 정말로 10만원에 합의를 해주었습니다. 합의를 했다기 보다 무서운 기세로 달려드는 젊은 아저씨가 겁이 나 더 이상 어떻게 못했던 것 같습니다.
제 대신 합의를 해준 젊은 아저씨 덕에 보험처리하지 않고, 병원비도 없이 수리비로 10만원만 받고 교통사고 합의를 하기로 했는데, 문제는 제 지갑에는 덜렁 만원도 없었습니다. ㅜㅜ
그 때는 10시 넘어서 하는 CD기도 없었구요.
기껏 젊은 아저씨가 합의를 해줬어도 돈이 없으니 방법이 없었습니다.
돈이 없다는 사정을 말하고 보험처리를 해드리겠다고 하자, 젊은 아저씨는 이런거 보험처리하면 분명 저 아저씨 입원할텐데 돈 많이 나올거라며 걱정해주었습니다.
그러더니, 제 대신 합의금 10만원을 선뜻 내주는 것이었습니다.
그 택시 아저씨는 어리버리한 초보운전자와 사고로 횡재하는 줄 알았다가, 왠 오지랖 넓은 젊은 녀석 때문에 10만원 받고 퉁치는 상황이 짜증이 났는지 궁시렁거리며 차를 몰고 사라졌습니다.
너무 감사하며, 내일 낮에 은행에서 이체시켜드리겠다고 계좌번호를 알려달라고 했더니, 백마탄 왕자같던 택시기사 아저씨는 내일도 같은 시간 쯤에 종로에 있을거라며 그냥 찾아가지고 오라고 하더니 사라졌습니다.
정말 진땀나는 상황에, 나서주셔서 대신 합의를 봐주고, 생판 처음 본 여자 대신 합의금까지 내주고는 전화번호 하나 받지도 않고 내일 그 자리에 있을테니 가져오라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떼먹으면 어쩌려고....
다음 날 저녁까지 정말 수 많은 생각이 스쳤습니다.
정말 좋은 분을 만나서 다행이라며 너무너무 감사한 마음과 함께 왜 알지도 못하는 여자의 교통사고에 끼어들어 돈까지 빌려줬을까 궁금했습니다. 남이 어려운 일 당하는 것을 못견디는 성격이라서 그랬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젊은 (나이차이 몇 살 안날듯한) 남자였기에 공주병도 스물스물 함께 도졌습니다.
젊은 남자가 낯선 여자에게 아무 이유없이 대신 나서서 합의를 해주고, 그것도 모자라 돈까지 덥썩 10만원을 빌려주었으니, 제가 마음에 들어서 그러나 싶었습니다. ^^;;;;; 급 소설가로 빙의하여 교통사고로 만난 인연을 소재로 한 드라마 몇 편을 썼죠.
괜히 남의 사고에 끼어들어 선뜻 떼일지도 모르는 10만원까지 내주는 대인배는 정말 흔치 않습니다. 그리고 입금시키라거나, 불안하니 명함이나 전화번호를 달라는 것도 아니고 다시 직접 갔다달라고 하니....
저는 결국 공주병 추론으로 점점 굳혀갔습니다.
'계좌이체로도 받을 수 있는데, 꼭 다시 직접 종로로 가져다 달라고 하다니..
나를 다시 보고 싶은가 보다...,'
하면서 혼자 상상의 나래를 펼쳤죠.
설레이는 마음으로 (저를 좋아하는 것 같은) 그 젊은 택시 아저씨가 있는 종로2가로 갔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하면서 10만원을 건네드리자, 그분은 쏘 쿨하게 "운전 조심하세요." 라는 한 마디를 남기고 바로 사라졌습니다.
응.......?
제가 좋아서 그런게 아니었던거죠......
저는 정말 첫눈에 반해서 좋아서 그런게 아니라면, 어떻게 처음보는 여자에게 10만원을 선뜻 빌려줬을까 싶었는데, 정말 그 아저씨는 그냥 제 상황이 딱했던 것 뿐이었나 봅니다.
괜한 상상을 했던 제 자신이 우스워서 피식 웃으면서도, 아무런 바라는 것 없이 도와줬던 그 아저씨가 너무나 감사했습니다.
벌써 9년 정도가 지난 지금도 종로를 지날 때나, 교통사고 이야기가 나오면 그 아저씨가 생각이 납니다.
차 사고가 나면 언성부터 높이며 안면몰수를 하고, 세워져 있는 남의 차에 테러를 하는 사람도 있지만, 생판 모르는 남의 차 사고를 도와주는 그런 분도 있습니다.
그 날 이후로 그 아저씨를 다시 본 적이 없는데, 혹시나 종로2가에서 어떤 여자아이의 차사고를 보고 10만원을 선뜻 빌려줬던 적이 있으시다면.... 다시 한 번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정말 감사했다고...
아저씨 덕분에 택시아저씨에 대한 오해도 사라지고, 사회의 온정을 믿고 있다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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