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라윈 생각거리 : 1시간이 1년 같았던 치매 할머니 돌보기
내일 모레가 엄마 생신이라 주말에 가족들이 모였습니다. 일요일 오후, 아빠도 제부도 나가고, 엄마와 동생, 조카, 할머니 그리고 저만 남았습니다. 동생이 엄마 생신선물로 옷을 사드리고 싶다며 모시고 쇼핑을 다녀오고 싶어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남아서 할머니와 조카를 보기로 했습니다. 가까운 곳에 잠시 다녀오는 거라서, 한 두 시간쯤 못 보겠나 싶었습니다. 처음에는 할머니도 별 말씀 없이 누워서 TV를 보시고, 조카도 아주 순하게 잘 놀았습니다.
그러나, 10분도 지나지 않아서 할머니께서 엄마와 동생을 찾기 시작하십니다.
"니 애미랑 동생은 나간지 얼마나 되었는데 왜 안온다냐....?"
"할머니... 나간지 10분도 안 되었어요.. 이제 도착했을 거에요...."
그렇게 몇 분도 안 되서, 엄마와 동생을 끊임없이 찾으십니다...ㅜㅜ
문제는 방실방실 잘 놀던 조카가 울음보가 터지고 나서 였습니다. 졸린데 뭔가 컨디션이 안 좋은 듯 조카가 칭얼대기 시작하더니 우렁차게 울어대기 시작했습니다. ㅠㅠ 젖병을 물려봐도 소용이 없고, 기저귀를 갈아줘도 소용이 없고, 안아주고 얼러봐도 도무지 그칠 기미가 안 보입니다. 가끔 잠투정할 때 우렁차게 우는 모습을 몇 번 봐서 그러려니 하면서 얼르고 있는데, 조카 우는 것에도 정신이 없는데.. 할머니는 더 난리십니다.
"얘야, 나 좀 일으켜다오.. 내가 애기를 업어볼께.."
혼자서 몸도 못 가누시는 분이 10kg나 되는 조카를 업으실 수 있을 리 만무합니다. 조카를 어르기도 바쁜 와중에 할머니까지 손을 허공에 휘저으시며 손을 붙잡아 달라고 하시니 답답했습니다. 내려놓자 더 악을 쓰고 우는 조카를 잠시두고, 할머니를 일으켜 드렸습니다. 아이를 달래기 위해 이모에게 전화를 하셔야 겠다는 엉뚱한 이야기부터, 갑자기 저는 알지도 못하는 이야기를 하시는 등.. 도무지 알아듣기 힘든 이야기들을 하시며, 계속 뭘 해달라고 하십니다.
조카는 그칠 줄 모르고 울어대고, 할머니는 계속 뭐라고 하시고, 정말 미칠 것 같았습니다.
할머니는 계속 뭐라고 하시더니, 무슨 기력이신지 갑자기 일어나시면서 어딘가 가시려고 하십니다. 어딜가시냐고 물으니 다시 자리에 주저 앉으시며 스산한 이야기를 하십니다.
"갈 길이 너무 멀어서.... 내가 오늘 못 갔다...
내가 가야 되는데.... 길이 너무 멀고 험해........"
뭔가 죽음을 암시하시는 것 같은 스산한 말씀에 소름이 돋고, 잡아드리지 않으면 자리에 앉으실 수도 없는 할머니가 뭔가 신비로운 힘으로 번쩍 일어나 어딘가 가시려고 하는 모습에 무서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조카는 계속 울고, 할머니는 뭐라도 쓰인 분처럼 너무 낯선 이야기와 행동을 계속하시고, 1시간이 1년도 넘는 것 같았습니다.
도저히 안되겠기에 전화를 했더니, 엄마도 동생도 집에서 핸드폰이 울립니다. ㅠㅠ 할머니의 이상한 행동이 무서워서 조카를 안고 집 대문으로 나갔습니다. 다행히 조카가 울음을 잠시 멈추고, 때맞춰 돌아오는 엄마와 동생이 보였습니다. 정말 구세주를 만난 기분이었습니다.
나와있는 것을 보면서 환하게 웃으며 빠른 걸음으로 오던 엄마와 동생은 눈물 콧물 범벅이 되어있는 조카와 넋이 나가있는 저를 보더니...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금세 눈치를 챈 모양이었습니다.
할머니 모시느라 집밖에 제대로 나가지도 못하시다가 생일이라고 모처럼 잠깐 다녀오신 것인데..... 그 잠깐을 제대로 못 있었던 것이 너무 부끄럽고 미안했습니다.
풀이 죽어 엄마와 동생에게 사과를 하자, 오히려 저를 달래주십니다. 원래 아이들은 잘 놀다가도 갑자기 그럴 수 있다고 하면서 위로를 해 주시고, 엄마는 오히려 얼이 빠져있는 저에게 미안해 하십니다.
"할머니랑 애기한테 시달려서 니가 너무 힘들었구나.. 혼자 두고 나가서 미안하다...."
엄마와 동생이 돌아오니... 이제야 살 것 같았습니다.
1년같이 길고, 끔찍했던 1시간 덕분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보다 할머니의 기행에 너무 놀라 머리도 아프고 가슴도 아렸습니다. 혼이 반쯤 나간 사람처럼 엄마옆에 주저앉아 할머니의 이상한 행동에 너무 무서웠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자 엄마는 더 놀라운 이야기를 하십니다.
할머니가 종종 엄마도 못 알아 보신다는 겁니다. 그래서 저녁시간이 되면 엄마에게
"아줌마, 일 다했으면 이제 집에 가세요. 아줌마도 집에 가서 저녁하고 신랑 기다려야지."
하신답니다. 그 이야기에 놀라고 있는데, 할머니께서 동생에게 엄한 질문을 하고 계십니다.
"애기엄마는 애기가 하나유? 위에 오빠나 언니는 없고?"
동생과 조카도 잠시 헷갈리고 계신가 봅니다. ㅜㅜ
할머니께서 치매 판정을 받으신지는 벌써 5년이 넘었습니다.
하지만 담당의사분도 기현상이라고 하실 정도로 아무런 증상이 없었습니다.
말씀 한 번 이상하게 하시는 적이 없이, 예전모습 그대로 셨습니다. 언제든 저희가 간다고 하면, 시장에 가셔서 손녀들 좋아하는 반찬을 해놓고 기다리시는 할머니셨고, 항상 따뜻하고 좋은 말씀만 해주시는 너무도 좋은 할머니셨습니다. 그랬던 할머니가 이렇게 변해버리시니 너무 당황스러웠습니다.
이상한 행동과 말씀에 맞추어 수발을 드는 것도 쉽지 않은 노릇이지만..
그보다 더 힘든 것은 너무 사랑했던 그 할머니가 다른 사람으로 변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정말 무엇에라도 씌인 듯한 그 모습에 심한 이질감을 느끼고, 속이 상합니다.
더욱 속이 상한 것은 할머니 스스로도 그런 사실을 알고 괴로워하신다는 것 입니다. 이상한 행동이나 말씀을 하시고 나서, 잠시 뒤에 정신이 돌아오시면 미안해 하시고 속상해하십니다.
"아이구.. 내가 왜 이런다니.... 미안하다... 이렇게 살아서 뭐한다니.. "
그 말씀에 또 가슴이 미어집니다.
또한 할머니께서 이상한 행동을 하시는 모습 속에서 평생 시달리신 강박이 튀어나와 더욱 가슴이 아픕니다. 할머니께서는 거의 매일같이 엄마에게 제사준비를 하라고 하신다고 합니다.
"오늘이 제산데 아직도 준비를 안하고 뭐하니.. 얼른 시장가서 장 봐오너라.."
하면서 엄마를 닦달하신다고 합니다. 평생을 종가집 맏며느리로 시달리셨던 것이 나타나나 봅니다.
기억이 끊어졌다 이어졌다 하는 와중에도 제사에 시달리시는 것을 보니, 할머니가 유일하게 부르시던 노래가 떠올랐습니다.
"석탄 백탄 타는데는 연기도 폴폴 나더니만..
이 내 가슴 타는데는 연기도 안 나는구나"
그렇게 연기도 없이 타던 속이 드디어 밖으로 표가 나는 것 같아 다시금 마음이 아파집니다....
그러면서도 막상 할머니가 이상한 행동과 말씀을 하시면 힘들고 미칠것 같고..
돌아가실 때가 되었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제 자신이 무섭고 죄송스러워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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