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라윈 문득 떠오른 기억 : KBS 스펀지 방송출연 부탁해놓고 갑질했던 씁쓸한 기억
세상 모든 갑(甲)들이 갑자기 수면 위로 떠오르는 듯, 곳곳의 갑질이 이야기되자 불쑥 3년 전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방송 출연 섭외를 해놓고 깜직한 갑질을 했던 KBS 스펀지 제작팀 입니다.
발단
사건의 시작은 짧은 이메일 하나 였습니다.
세상에! KBS 스펀지 작가라니!!!
이메일을 받고 콩닥콩닥 뛰며 몹시 설레였습니다. 제가 말을 재미나게 하는 편이 못되어, 출연은 못하더라도 즐겨봤던 프로그램 작가에게 섭외를 받았다는 자체에 들떴습니다. 연락을 할까 말까 망설이다가 다음 날 저녁 무렵 전화를 했습니다.
KBS 스펀지 작가 : 라라윈님을 저희 프로에 섭외하고 싶어요. 저희 이번 컨셉이 연애 전문가들 모시고 이야기 나누는 컨셉이거든요. 나오셔서 연애 비법을 알려주시는거에요.
라라윈 : 제가 재미있는 편이 아니라서요. 말도 돌려 말하고... 방송에서는 시원시원하게 딱딱 말해야 재미있잖아요.
KBS 스펀지 작가 : 괜찮아요. 연애 전문가 여러 명이 나오는거라 각기 스타일이 다른거니까요.
벌써 3년도 지난 일이라 정확한 대화 내용은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대화의 분위기는 제가 튕기면서 못 이기는 척하는 상황이었고, 작가님은 호쾌하고 친절하게 받아주는 분위기였습니다. 다른 작가님들과 상의를 하고 다시 연락을 준다고 하고 전화통화는 끝이 났습니다. 그 뒤로 연락이 없더니, 며칠 뒤 만나서 프로그램 기획회의를 하자고 연락이 왔습니다.
첫 만남
시간은 수요일 저녁 6시에 KBS에서 만나기로 했습니다.
약속 시간 전에 도착하여 KBS 주차장에 차를 주차한 뒤에 인증샷도 찍고...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1층 로비에 와 있다고 작가에게 전화를 했더니, 막내작가가 단걸음에 내려와 친절히 맞아주고 저를 데리고 회의실로 갔습니다. 회의실에는 아직 아무도 없었습니다.
혼자 멀뚱히 KBS의 한 회의실에 앉아 있었습니다.
막내작가는 뭔가 곤란한 듯 누군가에게 계속 전화를 했고, 난처한 듯 죄송하다고 조금만 기다려달라고 했습니다. 회사 일이 앞의 회의 등이 늦게 끝나거나 일정이 어긋날 수도 있지요.. 느긋하게 기다렸는데, 방송국에 처음 와서 혼자 앉아 있으려니 긴장이 되어 바짝 바짝 목이 탔습니다. 회의라고 하는데, 물도 없고 자료도 없고... 뭔가 준비가 어설펐습니다.
물 한잔 달라고 하니 어쩔 줄 몰라하며 전화기를 잡고 왔다 갔다 하던 막내작가가 물 한잔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무슨 회의인지 자료 같은 것은 없는지, 뭘 준비하면 되는지 물었으니... 전화 통화하던 작가와 마찬가지로 따로 준비할 것은 없고 그냥 편히 이야기 나누면 된다고 합니다.
10분...
15분..
20분...
어느덧 30분이 넘어가고 있었습니다.
회의 약속을 해놓고 30분째 안 나타나는 것도 슬슬 부아가 치미는데다가, 저녁 6시에 보자고 해서 저녁도 못 먹고 온 상황이라 배가 고파서 더 화가 나기 시작했습니다. (네. 저는 배고픔에 가장 민감합니다.)
35분이 넘어갈 무렵, 마치 학교 수업 시간에 들어오는 대학원생처럼 편안한 복장의 작가 몇 명이 노트북을 안고 들어왔습니다. 뒤이어 PD님과 작가님들이 우르르 들어와 제 반대편에 일렬로 앉았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들어오면서 하는 말이 가관이었습니다.
"아까 그 집 진짜 맛 있다. 고기 괜찮았져?"
"응. 괜찮더라." " 그 반찬 맛있었지?" "그건 짜던데." "@#^%&3"
저녁 먹은 집 평가를 하며, 반찬 냄새를 풀풀 풍기는 것이었습니다.
이제 보니, 저는 6시에 오라고 해놓고 자기들은 나가서 저녁을 먹고 왔던 겁니다. 그래서 막내작가는 안절부절 못하며 사수에게 전화를 하고 있었나 봅니다. 저는 제 시간에 와서 회의실에 앉아 기다리고 있고, PD와 작가들은 저녁을 쳐드시고 있었으니 가운데서 입장이 몹시 난처했던 모양입니다.
저녁 6시에 만나기로 약속을 하고, 저녁을 먹고 온 것도 황당한데 이어지는 회의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회의? no,no. 오디션.
저는 회의를 하려고 메모장을 펼쳐놓고 있었고, PD와 작가는 저의 프로필을 펼쳐들었습니다. 아마도 제 블로그에 올려 두었던 프로필을 보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종종 출판사 담당자님을 만나는 경우에도 회의 전에 제 프로필을 출력해서 가지고 계시는 경우가 있어서 그 자체가 불쾌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저에 대해 준비한 것이 고마운 일 입니다.
그러나 KBS에서는 상황이 달랐습니다. 이력서 앞에 놓고 면접을 보듯, 제 프로필이 맞는지 확인을 하더니 곧장 본론으로 들어갔습니다.방송에 출연하게 되면 무슨 이야기를 할 것인지 한 번 해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이야 기획을 했으니, 자신들이 무엇을 할지 알지만 저는 오늘 회의하려고 온 사람인데 말입니다. 제가 당황해서 어벙벙하게 있는 것을 눈치채고 작가 한 분이 빠른 속도로 프로그램 내용을 설명했습니다.
"연애 전문가들이 나와서 각자 자기 노하우를 말하는거에요. 그리고 판정단이 판정을 하고. 1등 하시는 분께는 상금도 있어요."
그리고 다시 물었습니다. 무슨 노하우를 이야기할 것인지.
이 상황은 회의가 아니라 오디션이었던 겁니다.
불러서 이야기하는 거 보고 재미있거나 방송에 출연 시킬 만 하면 시키고 아니면 그냥 보내는 자리였던 거지요.
제가 한 마디 한 마디 할 때마다 열댓 명 되는 작가들은 노트북 자판을 격렬히 두드려댔고, 미흡한 부분이 있으면 이 사람 저 사람이 파고들듯이 압박 면접을 했습니다. 자리 자체도 큰 회의실 저 하나를 두고, 건너편에 둘러 앉아 있으니... 저는 열 댓명의 면접관 앞에 앉은 지원자가 된 듯한 상황이었습니다.
6시 회의라고 하더니 저녁먹고 6시 40분에 나타나서...
회의하자고 하더니 오디션을 보고 있으려니...
불쾌감과 당혹감에 제가 무슨 말을 지껄였는지 모르겠습니다.
불편했다면 그 순간에 확실히 화를 내면서 의사표현을 했어야 하는데...
그 와중에도 KBS 스펀지 방송에 한 번 출연해 보고 싶은 욕심에, 화가 나는 것을 꾹꾹 참으면서 웃으면서 모든 질문에 성실히 답을 했습니다. 그 놈의 욕심 때문에....
그러나 PD나 작가들은 점점 얼굴이 굳어 갔습니다. 표정을 보아하니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준비 안 된 참가자를 보며 짜증날 때 흔히 보던 그 표정입니다. '무슨 노하우 말할거에요?' 라고 하는 순간, 준비된 멘트가 좌라락 튀어 나왔어야 하나 봅니다.
시선도 안 마주친 채 PD는 제 프로필을 인쇄해 놓은 듯한 종이와 무슨 내용이 적혀 있는지 모르겠는 서류들을 뒤적였고, PD였는지 대장작가였는지 중의 한 명이 이제 되었으니 자기들끼리 회의를 해보고 나중에 연락 할테니 나가라고 했습니다.
씁쓸한 결말
문을 닫고 나오는데... 연예인들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연예인 지망생도 아니고, 방송에 출연하고 싶어 환장한(?) 사람도 아님에도... 전문가랍시고 섭외해놓고 이렇게 대하는데... TV 한 번 출연하고 싶어 안달하는 연예인 지망생들에게는 어찌 할지... 상상도 안 됩니다.. 이런 상황을 다 참고 이겨냈을 유명한 스타들은 정말 대단한 것 같다는 감탄도 잠시... 또 울컥했습니다.
'내가 오디션 보고 싶다고 방송 출연 시켜달라고 조른 것도 아니고, 지들이 출연해달라고 부탁하더니 이게 무슨 상황이야? 원래 방송국 PD나 작가들은 다 이래? 아니면 대 KBS PD와 작가들이라 자기들이 뭐나 되는 듯 저러는거야? 배고파 죽겠네. 저녁에 불러놓고 자기들은 고기 먹고 오는건 대체 어느라나 예절이야?'
라고 속으로 욕을 욕을 하며, 길안내를 하는 작가 뒤를 따라서 좁은 복도를 걸어 나왔습니다. 차키를 찾다가 주차장에 대 놓은 차가 떠올라 주차권을 내밀었습니다. 주차권을 내밀자 저를 내보내려고 따라나온 작가는 당황한 듯 했습니다. 주차권을 받아들더니 어.. 저.. 음.. 이러더니, 저를 KBS 제작국 복도 어딘가에 세워두고 사라졌습니다. 한참을 멀뚱히 서서 기다렸더니 다시 돌아와서 도장은 따로 없고, 저녁이니까 그냥 알아서 차 빼서 가면 된다고 했다고 합니다. (주차권은 너무 큰 기대였어요)
어둑어둑 해는 지고..
물 한잔 얻어먹고 말을 너무 많이 했더니, 배는 쓰라리듯 고프고..
기분은 너무너무 더럽고...
KBS 기획회의 하러 왔다고 SNS에 안 올린게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만 들고...
불과 한 시간 만에... 6시에 주차할 때의 설레였던 기분은 오간데 없이 비참한 기분만 들었습니다.
'내가 정말 유명한, 혹은 대단한 사람이었다면 이 사람들이 '사람'을 이런 식으로 대할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에 억울하고 분하기도 하고...
'그깟 방송 출연 하나 안하나 나한테 별다른 것도 없는데, 그걸 한 번 출연해 보겠다고 자존심 구겨가면서 왜 거기 앉아 있었니. 이 멍충아. 15분 지각 했을 때 그냥 박차고 나왔어야지. 아니면 압박면접 할 때 이게 뭐하는 짓이냐고 했어야지.. 아.. 그러기에는 거기 사람이 너무 많아서 무섭더라..'
라는 생각에 제 자신이 너무 못났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차를 빼서, KBS 앞쪽에 대놓고, 밥부터 먹었습니다.
불과 한 시간만에 위대한 KBS 스펀지 팀 덕분에 자존감에 상처도 입고, 배도 너무 고파, 좀 더 무리해서 맛있는 것을 사 먹었습니다. 앞에 초밥집이 있길래 제가 몹시 좋아라 하는 초밥을 사 먹었는데.. 무슨 맛인지 잘 느껴지지도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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