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업식날 우리는 16년 뒤 3월 1일에 다시 만나자는 약속을 했습니다.
선생님은 매년 제자들과 16년 후의 만남을 약속하셨고, 벌써 두 번 제자들을 만났다고 하셨습니다. 3월 1일 남산 식물원에 나가 누가올까 기다리노라면, 신기하게도 아이들이 하나 둘 모여들어 만남을 가지셨다고 합니다.
저희와의 16년 뒤의 만남을 기대하시면서, 3월1일은 국경일이니까 대부분 쉬는 날 일 것이고, 남산식물원이 만약 없어진다해도 그 자리에서 만나자는 약속을 했습니다. 그 날 친구가 약속장소와 시간을 적어준 쪽지를 일기장에 붙여두었기에, 오래도록 잊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오늘이 바로 16년 전 약속을 했던 그 날이었습니다.
계속 만나고 연락하던 친구들도 있지만, 연락이 끊긴 친구들의 소식도 궁금하고, 과연 누가 나올까 정말 궁금했습니다. 일부러 다른 친구들과 만날 약속을 하지 않고 약속장소로 향했습니다.
이런 날 날씨가 더 좋았으면 좋으련만, 설레이는 마음과는 달리 눈으로 변한 비가 쏟아졌습니다.
날씨때문에 안 오는 친구도 있지 않을까, 몇 명이나 모일까, 혹시 선생님 혼자서 기다리고 계시는 것은 아닐까 싶었습니다. 선생님은 매년 이 날 제자들과 모이셨으니 잊지 않으셨겠지요..
남산 식물원은 없어졌고, 식물원 자리에서 모이기로 했지만 아무래도 야외식물원으로 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우선 야외식물원으로 갔습니다. 눈보라때문에 도착하고보니 10시 10분쯤이었습니다.
'설마 10분때문에 가버리는 것은 아니겠지...'
하면서 부지런히 주차장으로 들어섰는데, 이런! 주차장에 차가 한 대도 없습니다.
설마 아무도 안 올걸까요? 아니면 모두 원래 식물원 자리로 간걸까요?
그래도 혹시 몰라서 야외식물원에 올라가 보았습니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사람이라고는 보이지 않습니다.
남식식물원이 없어지더라도 식물원자리에서 보자고 하셨는데, 역시 식물원자리에 모인 걸까요?
서둘러 주차장으로 돌아와 남산식물원을 물었습니다.
주차장 아저씨는
"남산식물원 없어진지 오래되었어요. 왜 자꾸 거기를 찾으세요?"
라고 물으면서도 간절한 제 표정을 보시더니 다시 차를 타고 나가서 하얀 건물이 보이는 곳으로 들어가라며 길을 알려주셨습니다. 아저씨가 가르쳐주신 곳으로 가는 길은 더 떨렸습니다. 야외식물원을 헤매다가 다시 남산식물원자리에 도착한 것은 10시 30분 경이었습니다. 이 곳 주차장은 차들이 꽤 많았습니다. 혹시나 나온 사람이 있을까 하는 마음에 차에서 내려 다시 남산식물원을 찾았습니다. 순찰도는 경찰아저씨께 여쭙자, 벌써 오래 전 없어진 식물원을 왜 찾는지 의아한 눈치로 한 분은 없어졌다고만 하시고, 좀 더 연세가 있으신 분은 저 위의 화장실 있는 곳이라며 위치를 가르쳐주셨습니다.
3월의 때아닌 눈비를 맞으며 그 곳으로 향했습니다.
'선생님은 계시겠지. 벌써 16년이나 지나서 못 알아보시는 것은 아닐까. 아니야. 난 유치원때부터 지금까지 얼굴이 똑같아서 알아보실거야. 누가 나왔을까. 설마 아무도 안 온 것은 아니겠지...'
점점 생각이 많아졌습니다. 예전 식물원 근처에 다가가자, 드디어 사람이 보입니다!
아... 떨렸습니다. 점점 가까이 다가서자 그냥 산책하는 아저씨였습니다.
또 다시 사람이 보였습니다! 역시 산책하는 아저씨입니다.
그 때 멀리서 노란우비를 입은 젊은 여자가 보입니다. 내 동창일까? 아니었습니다.
저 멀리 가족을 데리고 나온 또래의 남자도 보입니다. 내 동창일까? 역시 아니었습니다.
그 주변을 헤매었지만, 제가 아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더 찾아보고 싶었지만, 설레이는 마음과 3월이라는 생각에 옷을 얇게 입고 나왔더니 살을 에이는 3월의 칼바람 눈비때문에 추워서 견디기가 어려웠습니다. 더 이상 찾아보는 것은 포기하고 차로 돌아왔습니다.
혹시 제가 더 올라가지 않아서, 정확한 남산 식물원 자리를 몰라서 다른 사람들을 못 만난 것일까요...?
아무도 오늘 약속을 기억하지 못한 걸까요....?
제가 야외식물원에 들러서 오느라 30분 정도 늦어서 모두 가버린걸까요...?
선생님은... 혹시 어디 편찮으셔서, 오늘 선생님도 못 나오신 것일까요...?
중학교 동창들에게 전화해 왜 안 왔냐며 물어볼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지금 기분에 "넌 이런 날씨에 거길 나가있냐?" 라는 소리라도 들으면 한 없이 우울해질 것 같았습니다. 굳이 지금 전화하지 않아도, 얼마 뒤에 결혼하는 친구가 있어 같은 반 친구들을 만나게 됩니다.
그러면 진실을 알게 되겠죠..
저 혼자 나가있던 것인지, 제가 야외식물원을 헤매다가 늦게 도착해서 엇갈린 것인지.......
이런 약속을 하셨던 선생님은 여러 추억을 주신 분 입니다.
프린터도 없던 시절, 선생님은 직접 좋은 글을 써서, 아이들에게 코팅을 해서 나눠주셨습니다.
몇년 전 들었던 선생님의 소식은, 수업에 들어가셔서 학생들을 업고, 교실 한바퀴씩을 돌며 사랑을 나눠주고 계신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제는 선생님도 연세가 많으실텐데, 거구의 학생들을 업고 교실 한바퀴를 돌며, 마음을 전하시기 쉽지 않을 것 같은데, 선생님은 힘이 닿는한 아이들에게 조금이라도 더 사랑을 나눠주고 싶으신가 봅니다.
오늘 뵙지 못하자, 더 생각나고 그동안 찾아뵙지 못한 것이 죄송스럽습니다. 혹시 오늘도 선생님은 다른 장소에서 아이들을 기다리신 것은 아닐지 걱정이 됩니다...
춥고 아무도 만나지 못해 아쉬웠지만, 누군가를 설레이게 기다리고 찾아헤맬 수 있는 약속이 있다는 것은 행복했습니다. 하지만 정말 아쉬웠습니다...........
보고 싶었는데....
그리웠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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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세대육체적 댓글주소 수정/삭제 답글달기
크헉,,.아쉽습니다만 라라윈님께서는 끝까지 이 약속을 기억하고 계셨군요.
대단하십니다.
저도 언젠가 그런 약속을 한 기억이 있는데...
세월이 이렇게 저를..ㅠㅜ
nejame 댓글주소 수정/삭제 답글달기
아마 약속장소에 안나오신 분들도 생각은 하고계셨지않나 싶어요 설마 날씨도 꾸물거렸고 누가 나올까 하는생각에 생각만 하지 않았을까요? 저도 추억을 생각나게 하네요^^
왕방홀릭 댓글주소 수정/삭제 답글달기
이런 추억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부자인거죠~ ^^~
넘 상심마세용~~ ^^
Dion M.tony 댓글주소 수정/삭제 답글달기
타임캡슐 아닌 타임티켓인가요? 하하
낭만적인 선생님이시군요
나인식스 댓글주소 수정/삭제 답글달기
★윽 전 내심 누군가 나올지 알고 기대했었는데요,
정말 아쉬운 발걸음이였네요..ㅠㅠ
Design_N 댓글주소 수정/삭제 답글달기
왠지 영화같고 멋진데요?^^
아무도 못 만나서 아쉽긴 하셨겠어요ㅎㅎ
Zorro 댓글주소 수정/삭제 답글달기
일단 위로의 버튼 팍팍 눌렀습니다~ 힘내시구요^^!
정말 영화같은 스토리인데.. 친구들이 나왔음 얼마나 좋았을까라는 생각이 드네요..
다들 생각만 하고 선뜻 나오질 못한걸꺼에요.. 혹시 엇갈렸을수도?
친구분들을 만나면... 어떻게 된건지 꼭 들려주셔야해요~
산다는건 댓글주소 수정/삭제 답글달기
역시 현실은 냉정한....쿨럭...ㅡ.ㅡ;;;
그나저나 이 글로 라라윈님의 연세가 추측이 가능해지는군요...
하록킴 댓글주소 수정/삭제 답글달기
헐 이런 영화같은 일이 신기하기도 하고 부럽기도 하네요^^
미자라지 댓글주소 수정/삭제 답글달기
학창시절에 그런 약속 많이 하죠...
그러면서 선생님께서 말씀하시죠...
니들은 다 잊어버릴거야...아무도 기억 못할걸?
전 정말 기억 못했습니다..ㅋ
⎿ 라라윈 답글주소 수정/삭제답글달기
선생님은 매년 같은 약속을 해놓고 나가신다고 하고
아이들도 모일때마다 이야기해서
다들 나올 줄 알았었어요...ㅜㅜ
NYerYS 댓글주소 수정/삭제 답글달기
라라윈님 링컨 타시는거? ㅎㄷㄷ...
⎿ 라라윈 답글주소 수정/삭제답글달기
아니에요~~~~~~
못된준코 댓글주소 수정/삭제 답글달기
추억의 한자락이 참 그리울 때가 많은데...너무나 아쉬웠겠어요...
언제든..기회가 된다면....다시 시도해 보세요.
기적이 일어날지 또 모르는거 아니겠음??
⎿ 라라윈 답글주소 수정/삭제답글달기
기적이 그리운 날이었어요....
미미씨 댓글주소 수정/삭제 답글달기
그 약속이 지켜졌다면 좋았을텐데요. 근데 아마도 어린날의 이런 약속들은 흔하게 잊혀지는거 같단 생각이...
그대로 지킬 사람은 정말로 말 그대로 티비에 나오는 경우나 가능한게 아니냐고...이러고 있습니다. -_-
⎿ 라라윈 답글주소 수정/삭제답글달기
맞아요..
그래서 이런 일이 지켜지면 영화소재가 되나봐요..ㅜㅜ
라이너스 댓글주소 수정/삭제 답글달기
그래도 추억이 있기에 아름다운거 아니겠어요? ^^
잘보고갑니다. 멋진 오후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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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추억만으로도 재미있는 시간이었어요...^^
대학졸업때 댓글주소 수정/삭제 답글달기
저도 대학졸업하면서 친했던 4명과 매년 같은 날 명동성당에서 만나자고 약속하고 그날 찾아갔는데 아무도 안나왔더군요. 나중에 가장 친했던 친구에게 전화하여 왜 안 나왔는지 물었더니 그 전 주가 아니었냐고 그러더군요. 자기는 그 전 주에 나왔는데 아무도 안 나와서 무척 실망했었다고... 결국 그 다음 해부터는 나가지 않았습니다. 간격이 긴 약속일수록 지키기를 기대하는 건 무리라는 걸 깨달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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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가 봐요.....
친구 한 명도 올해인지 아닌지 헷갈렸다고 하더라구요...
간격이 길어지면 지키기도 어려워지는 것 같아요...ㅜㅜ
촌스런블로그 댓글주소 수정/삭제 답글달기
16년에 한 약속을 지키기란 그리 쉽지 만은 않은데...선생님과 친구분들을 만나지 못해서 아쉬움이 너무 크시겠어요.
그래도 너무 좋으신 선생님 친구들이 있기에 정말 행복하신 것 같아요~~
⎿ 라라윈 답글주소 수정/삭제답글달기
추억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하긴 해요...
그래도 그 날 선생님과 친구들이 나왔으면 더 좋았을텐데..
아쉬워요....ㅜㅜ
zjadufao 댓글주소 수정/삭제 답글달기
그뒤 친구결혼식에 가서 무엇을 들었나요.
못 나온 사연이 무엇인가요.
아닌 장소가 다른곳이던가요
⎿ 라라윈 답글주소 수정/삭제답글달기
친구 결혼식에서 만나서 물어보니,
기억 하고 있었는데, 눈보라가 몰아치길래 아무도 안 올 것 같아서
집에서 망설이다 그냥 있었던 친구도 있고,
계속 기억하고 있었는데, 그 약속이 올해인지 착각해서 못 온 친구도 있고,
시간 많냐고 놀리던 친구도 있고,
당연히 친구들이 연락해 줄 줄 알고 별 신경없이 있었던 친구도 있었어요.....ㅜㅜ
한 친구는 이 이야기에
"16년 동안 절대 잊지 않을 줄 알았는데....
잊어 버렸었어...ㅜㅜ"
하면서 자책을 해서 더 이상 말을 할 수 없었어요...
아뭏든 참 아쉽습니다.....ㅠㅠㅠㅠ
녹차마루 댓글주소 수정/삭제 답글달기
저는 중학교 3학년때 강촌에 있는.. 산 어딘가에 반 친구들하고 선생님과 타임캡슐 묻었었는데..
기억이 가물가물해요.ㅠㅠ
거시기.. 댓글주소 수정/삭제 답글달기
기억하고..손꼽아기다린 당신이 대단해여...얼마나그리웠으면
ㄹㄹ 댓글주소 수정/삭제 답글달기
그분은 84년도 제 담임쌤셨죠.구수한 전라도 사투리에 참 선한 선생님이셨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