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라윈 생각거리 : 늘 뭔가 해야될 것 같은, 놀면 안 될 것 같은 압박과의 싸움
올 여름 가장 마음에 와 닿았던 조언은 자치동갑국악원 원장님께서 하신
"그냥 아무 것도 하지 마요. 올해 같은 무더위에는 건강하게 아프지 않고 나는 것 만으로도 성공한거야. 뭘 할려고 하지 마요."
였습니다. 보통 추위는 못 견뎌도 더위는 잘 견뎠는데 올해는 처음으로 더위도 먹고 (▶︎ 더위먹고 냉방병? 더위 먹었을 때 vs 냉방병 증상), 작년 여름에는 처음으로 자전거를 사서 여름 내내 신나게 타고 한강도 다녀왔는데 올해는 문 밖에 나가는 것 만으로도 힘이 들었습니다. 나이 먹어서 그런가, 체력이 떨어졌나 싶어 무척 우울했습니다. 다행히(?) 저만 이런 것이 아니라, 1994년 무더위와 맞먹을 정도로 올해가 무척 더웠다고 합니다. 한의원에서 예년에 비해 1.5배 정도 더 많은 분들이 보약을 지어갔다고 하고, 미용실에서는 폭염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머리를 짧게 자르기도 했다고 합니다. 더워도 너무 덥다고...
다소 못된 마음이나, 저만 힘든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올 여름은 힘들다고 하고 위안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정말로 올 여름은 아프지 말고 보내자는 생각으로 아무 것도 안 하고, 몸만 챙기며 잘 넘겼습니다.
동물들은 지혜롭게 덥고 추우면 축 늘어져서 다음을 기약하는데, 저도 너무 덥고 힘들때는 몸을 사리는 동물들의 지혜를 배우겠다며 몸을 사리고 여름을 넘겼습니다.
그런데 미친듯이 덥고 습하더니, 갑자기 어처구니 없을 정도로 서늘해져버렸습니다. 정말 날씨 태세전환이 우디르급.
# 날씨 변화만큼 급격한 마음의 변화
날씨가 서늘해지자, 그동안 귀찮아서 빼먹은 일일기록을 다시 정리해 보았습니다.
우와.... 정말 아무것도 안 했어요. 우와...
아무 것도 안 했는데, 벌써 여름이 갔네요?? 우와.... 젠장...
게다가 개강이에요. 방학 때 뭘 좀 했어야 하는데...
직장인에게 방학이란 그냥 학교 가야 한다는 부담이 평소보다 조금 더 적다는 정도 차이밖에 없긴 하지만, 그래도 여름방학 두어달이면 외국어 공부라도 하든가, 논문 진행을 좀 더 많이 시켰든가, 뭔가 했어야 할 것 같습니다.
이렇게 허무하게 여름이 갈수가..
게다가 너무 더워서 어질어질하기에 "무더위 가시면..." 이라며 미뤄놓은 일들이 막 몰려드네요. ㅠㅠㅠㅠㅠㅠㅠㅠ
제 마음의 태세전환도 가히 우디르급이었습니다.
더워 죽겠을 때는 '그래, 아무것도 하지 말자. 이렇게 더울때 몸을 보전하며 다음을 기약하는 것이 지혜로운거지.' 라고 해놓고는 찬바람 불었다고 '여름에 아무것도 안하다니.. 한심해... 뭘 좀 했어야 되는데...' 라면서 후회를 하고 있습니다.
작년에 수술 받으며 한 달 정도 쉬면서 느낀 점이 아둥바둥 맨날 '뭔가 해야 될 것 같은데...' '놀면 안 될 것 같은데...' 라는 압박에서 좀 벗어나서 살자는 것이었으나, 수 십년간 강박적으로 살아온 것이 어디가지 않았나 봅니다.
방학기간이면 뭘 좀 더 해야될 것 같다는 압박.
늘 뭔가 해야 될 것 같고, 했어야 될 것 같다는 압박.
에서 한 걸음도 벗어나지 못했나 봅니다.
이런다고 엄청 부자가 되는 것도 아니요, 대단한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닌데....
중고등학생때 "얘들아, 공부 잘 하는 사람들은 버스에서도 단어를 외운단다." "화장실 갈 때도 단어 5개씩만 외우면 몇 개겠니?" "하루 1분씩만 해도 1년이면 얼마나 다르겠니?" 같은 이야기들이 머리속에 콕 박혀서, '아무 것도 안하고 쉰다'라는 것을 용납을 못 하는 것 같습니다. 나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지기도 하고, 죄책감이 느껴지기도 하고요. 중고등학생 때 뿐 아니라, 여전히 성공하는 사람들은 하루 30분씩 뭘 한다, 짜투리 시간 관리를 잘 한다, 라면서 잠시라도 멍 때리고 있는 것이 루저의 특징처럼 세뇌되어 아무 것도 안하면 불안해집니다. 뭔가 해야 될 것 같고, 놀면 안 될 것 같고...
# 멍 때리고, 쉬어야 성공한다는 역설적 연구 결과
저같이 늘 뭔가 해야될 것 같은 압박에 시달리는 사람에게 빛이 되는 연구 결과들이 있습니다. 멍때리고 쉬어야 성공한다는 것 입니다.
fMRI(기능성 자기 공명 영상, MRI, CT같이 찍어보는 것)으로 연구한 결과, 뇌가 아무런 활동을 하지 않을 때만 작동하는 특정 부위가 있다고 합니다. 잠을 자거나, 멍 때리거나, 나는 아무 생각이 없다, 이럴 때만 작동하는 특정 부위가 있대요. 이 부위를 학자들은 '디폴트 모드 네트워크 (DMN, default mode network)'라고 한다고 합니다.
이 디폴트모드네트워크 라는 부위가 하는 역할은 뇌가 정상적으로 활동하도록 하는데 있어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합니다. 저는 제멋대로 '멍때림 뇌'라고 별명을 붙였습니다.
(1) 멍때림 뇌가 활성화될수록 집중력이 필요한 일의 수행능력이 올라간다고 합니다. 예전 연구 결과와 다르네요.
(2) 멍때림 뇌가 활성화되면 창의성이 높아져서 수행 결과도 좋아진다고 합니다. 실험 결과 멍때림 뇌가 활발할수록(잘 멍때리고 아무것도 하지 않을수록?), 새로운 아이디어를 빨리 내는 실험에서 좋은 성적을 받았다고 합니다.
(3) 멍때림 뇌가 활성화 되면,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메타인지 능력도 좋아진다고 합니다. 자신을 객관화 하면서 반성도 하고 명상도 할 수 있다고 합니다.
(4) 사춘기 청소년들도 '멍때림 뇌' 활동이 원활하지 않다고 합니다. 멍때림 뇌가 활발히 활동하지 않기 때문에 자신을 되돌아보는 기능, 객관화 하는 기능이 떨어지면서 중2병 시기 흑역사를 양산하게 되나 봅니다....
(5) 알츠하이머 환자들은 '멍때림 뇌' 활동이 거의 없다고 합니다. 치매에 걸리면 멍때리고 아무것도 하지 않을때 활성화되는 부위가 활동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강원대 심리학과 강은주 교수님이 쓰신 멍때림 뇌에 관한 글 (http://www.mt.co.kr/view/mtview.php?type=1&no=2014071710077132010&outlink=1)을 읽다보니, 명상을 하는 것으로 이런 좋은 상태 (긍정적 멍때림 상태)를 훈련할 수 있다고 합니다.
# 함정
'그래, 가끔 멍하니 있는게 좋은거야, 아무 생각없이 있어야 더 창의적이 되기도 하고 도움이 된다며...' 라고 하면서
'가끔은 아무 생각도 안 해야 하는데...' 라는 것도 '뭔가 해야 될 것 같은데..' 같은 '할 일'처럼 취급하네요...
늘 뭔가 해야 될 것 같은 압박을 내려놓으려면 아직 멀고 멀었나 봅니다....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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