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주인의식 #4
“꿈이 뭐에요?” 나이 먹고도 이런 질문을 하는 눈치 없는 양반들이 있습니다. 어른에게 꿈이 뭐냐고 물으면 현재 직업을 무시하는 인상을 줄 수도 있고, 별다른 꿈이 없는데 곤란하게 만드는 질문이 되곤 합니다. 그래서 어른, 성인에게는 꿈이 뭐냐는 질문을 잘 안 하지요. 그러나 어딜가나 남이 곤란하건 말건 이런 질문을 하는 사람이 있게 마련입니다.
갑자기 꿈이 뭐냐는 질문을 받으면 당황스러웠습니다. 솔직하게 “그냥 쉬고 싶어요.” “그냥 외국에서 한 두 달 살아보고 싶어요.” 같은 소리를 하면 한심한 인간으로 낙인찍히기 쉽상이었고요.
대뜸 “그럴거면 박사는 뭣하러 했어?” 라는 화살이 날아오기도 했습니다.
“그냥 공부하고 싶어서요.” 라거나 “좋아서요.” 라고 하면 2차 한심함 콤보 눈빛이 날아옵니다. 제가 박사과정 등록금 낼 때마다 괴로워 하면서 돈 마련하던 꼴을 봤던 사람들은 더 어처구니 없어했습니다. 돈도 없는 주제에 부잣집 딸이나 사모님이 할 법한 소리를 한다고 여겼습니다. 면전에 대고 그 나이 먹고 정신 못 차렸다고 혀를 차고 싶어 보였으나, 자신의 인상관리를 위해 꾹 참는 듯 하기도 했고요.
이런 불편한 시선을 피하고 싶다면, 모범답안은 “저는 훌륭한 연애심리 전문가가 될거에요.” “저는 최고의 작가가 될거에요.” 같은 말 입니다.
흔히 이야기되는 ‘꿈’이란 사회에 기여할 수 있고, 타인에게 존경받을 수 있는 ‘직업’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릴 때부터 꿈 이라고 하면 장래희망이라 하고, 미래에 되고 싶은 직업을 적어 왔기 때문에, 꿈을 묻는 말에 자신이 해보고 싶은 것들을 이야기하면 맥락을 이해 못하는 사람이 됩니다.
꿈이란 뭘까요?
꿈의 사전적 정의부터 보면, 실현하고 싶은 희망이나 이상을 의미합니다. 그와 동시에 실현될 가능성이 아주 적거나 전혀 없는 헛된 기대나 생각도 꿈입니다. 사전적 정의에는 어디에도 꿈이 직업만 의미한다고 한정되어 있지 않습니다.
꿈을 크게 갖는다는 것이 대통령이나 UN총장이 되고 싶다는 것만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희망사항이 엉뚱한 정도, 희망사항의 갯수가 많은 정도를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영화 "킹스맨"의 악역 발렌타인의 꿈은 지구를 되살리는 것입니다. 그는 갖은 방법을 시도하다가 가이아 이론에 빠져들며, 지구의 바이러스 같은 존재인 인구 수를 획기적으로 줄이면 병든 지구를 되살릴 수 있으리라는 결론에 다다릅니다. 엔드게임의 타노스와 비슷한 꿈이죠. 그 정도면 꿈의 크기로는 큰 꿈 아닐까요.
방법은 아직 모르겠지만 지구인 모두를 행복하게 하고 싶다는 것도 큰 꿈이 될 수 있습니다.
지구 단위까지 가지 않더라도 안분지족(安分知足)하는 것, 자기 분수에 만족하며 편안히 사는 것도 꿈일 수 있습니다. 일제 시대를 거치기 전, 자본주의의 손길이 닿기 전, 우리 조상들은 안분지족하는 것도 근사한 꿈으로 여겨줬습니다. 교과서에도 실린 시에 안빈낙도(安貧樂道, 가난에 구애받지 않고 평안하게 도를 즐김)가 이상향이자 꿈이라 소개되기도 했습니다.
꿈을 직업으로, 특히 사회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고 돈을 버는 직업에 한정해서 말하는 순간, 꿈은 줄어듭니다. 반면, 꿈을 하고 싶은 활동, 좋아하는 것, 살아가고 싶은 이상향으로 정의한다면 나이 들수록 꿈은 많아질 수 있습니다.
꿈은 없고요, 그냥 놀고 싶어요
꿈을 직업에 한정하지 말고, 넓은 의미로 보자고 주장한다고 한 순간에 사회적 맥락이 바뀌지는 않습니다.
그러니 꿈이 뭐냐는 질문에 직업으로 답할 수 없다면, 차라리 꿈이 없다고 하는 것이 나을 때도 많습니다. 사는게 너무 피곤해서 꿈은 없다고 하면 동정이라도 받을 수 있으니까요.
꿈은 없는 극단적 상황은 어떤 상황일까요?
히야마 아마리의 이야기를 예로 들 수 있습니다.
하고 싶은 것이 없고, 그냥 쉬고 싶던 어느 날 "스물 아홉 생일 1년 후 죽기로 결심했다"를 읽었어요. 현정이가 추천했던 책인데, 시간이 붕 떠서 도서관에 앉아 있던 중에 핫북 코너에 너덜너덜한 이 책이 눈에 띄었습니다. 2012년에 나온 책인데, 5년이 지난 지금까지 도서관 핫북이라니. 이 책은 실화를 바탕으로 한 소설로 일본감동대상 대상을 수상한 책입니다.
저자 히야마 아마리는 스물 아홉 생일날 혼자 자취방에서 조각케이크를 먹다가 조각케이크에 올려진 딸기가 굴러 떨어져 낑낑대며 주어 먹습니다. 그 순간 자신의 처지가 너무 비참하다 느낍니다. 대학 때 결혼을 생각하며 사귀던 남자친구와 헤어져 솔로이고, 변변찮은 직업 없이 파견직이고, 관리를 하지 않아 뚱뚱하고 못생겼으며 딱히 잘 하는 것도 하고 싶은 것도 없었습니다. 뭐 하나 마음에 드는 것이 없는 상황에 바닥에 떨어진 딸기를 먹겠다고 궁상 떨고 있는 꼬라지에 울컥해 버립니다. 그러나 죽는 것도 용기가 필요한 일이라 첫번째 자살시도는 실패로 끝납니다. 그리고 또 스스로를 못났다 생각합니다. 죽지도 못한다고.
그 때 TV에서 라스베가스에서 게임을 하는 화려한 모습이 나옵니다. 죽는 순간까지 딸기나 주어 먹고 있는 찌질한 모습 대신, 마지막 순간에 라스베가스에서 전재산을 탕진하고 멋지게 호텔방에서 자살하겠다는 꿈을 꿉니다. 라스베가스에서 탕진하고 죽는다는 것이 꿈이라...
하지만 ‘사회적 기여나 타인의 인정’의 기준으로는 꿈이라 할 수 없는 그 꿈은 저자의 삶을 바꿉니다.
라스베가스에 가려면 비행기 요금과 숙박비, 게임을 할 돈이 필요합니다. 한 푼도 없던 저자는 알바를 시작합니다. 돈 많이 주는 부업을 찾다가 처음으로 찾은 것이 호스티스 입니다. 사회적 기준으로는 "술집에서 일한다고?" 이런 느낌이나 호스티스로 취업하는 것도 어려웠습니다. 저자는 이미 망가진 상태라 뚱뚱하고 못생겼기 때문입니다. 간신히 일손이 몹시 딸리던 한 곳에 취업을 하게 되는데, 이 때 쓰는 예명이 아마리 입니다. 아마리는 일본어로 여분, 짜투리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이미 죽으려고 했는데, 1년 후 서른 살 생일에 라스베가스에서 화려한 밤을 보낸 뒤 죽기로 결심했기 때문에, 1년의 여분이 주어졌다는 의미였습니다.
호스티스 생활을 하며, 아마리는 사람에 대해 이해하고 교감을 하게 되고, 꾸미는 법을 배우면서 점점 예뻐집니다. 호스티스 일 만으로는 1년 내에 라스베가스에 갈 비용을 마련할 수 없자, 아마리는 누드모델도 하고, 잔업도 하고 닥치는 대로 일을 합니다. 그러다 쓰러질 정도로요.
그 과정에서 아마리의 꿈을 이해해주는 친구도 만납니다. 친구들은 아마리를 응원할 뿐 아니라, 아마리가 화려한 마지막을 보낼 수 있도록 영어 회화 연습을 도와주기도 하고, 블랙잭 연습을 함께 해 주기도 했습니다.
라스베가스의 마지막 밤을 위해 악착같이 준비한 끝에 서른 살 생일에 아마리는 라스베가스로 간다. 그리고 멋드러지게 호텔에서 블랙잭을 즐기며 재산을 탕진합니다. 그리고 죽기 위해 호텔방으로 올라옵니다. 남은 돈을 따져보니, 번 것도 딴 것도 없이 그대로 였습니다. 그리고 거울 속에는 뭐 하나 잘하는 것 없고 못난 여자가 아닌, 예쁘고 세련되고 무엇이든 해낼 수 있는 멋진 여자가 있었습니다.
아마리는 죽는 대신 일본으로 돌아와 제2의 삶을 살기 시작했습니다. 라스베가스에 가기 위해 영어 회화를 열심히 했기에 글로벌 기업에 취업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실화라는 것이 믿기지 않는 놀라운 이야기인데, 이 책은 꿈을 직업이라는 좁은 의미로 한정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꿈을 가지라고 하는 것이 ‘성과창출’을 위한 ‘동기부여’ 목적일 때가 많은데, 내년 생일에 근사하게 죽기 위해 누구보다 악착같이 1년을 살아냈으니 대단한 성과이자 동기부여가 아닐까요.
쉬고 싶은것, 그냥 이유없이 해외에서 몇 달 살고 싶은 것이라도 그것이 자신을 행복하게 만들고, 의욕을 불어 넣어주면 됩니다. 물론, 이 와중에 사회적 비교가 일어나며 해외가서 한 두달 살고 싶다는 꿈이 내년 생일날 죽겠다는 것보다는 조금 낫다는 위안을 느낄 수도 있고요.
"꿈은 없고요, 그냥 놀고 싶어요." 가 아니라, “노는게 꿈이에요.” 일 수도 있습니다. 무엇이 되었든 간에, 삶의 의욕을 높이고 동기부여를 해주면 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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