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라윈 생각거리 : 민방위 훈련하며 느낀, 가만히 있으라 공포

지난달 20일. 오후 2시에 디지털미디어시티에 가다가 민방위 훈련에 딱 걸렸습니다. 목적지 한 정거장 앞에서 싸이렌이 울리자, 똥색 점퍼를 입은 분들이 나타나 가만히 있으라고 하였고, 제가 타고 있던 버스는 좌회전에 걸린 채 사거리 한복판에서 5분 남짓 서 있었습니다. 그 순간, '만약 정말 전시라면 나는 죽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실제로 대피를 하는 연습을 하는 것도 아니고, 그냥 멀뚱히 차 안에 앉아서 재수없게 민방위 훈련에 걸렸다며 시계를 쳐다보는 것이 전부였거든요.


민방위 훈련, 가만히 있으라


사거리 한복판에 똥색 점퍼를 입은 분이 나타나 가만히 있으라고 하니, 차들은 갓길로 대피하는 것도 아니고 그냥 서 있던 자리에서 신호등이 고장난 것처럼 가만히 있었습니다. 사거리라 좌회전 하려고 1차로에 붙어 서 있는 차들이 많았는데 모두들 1차로에 그대로 있었습니다. 기다리기 짜증난 차들이 움찔움찔 움직이려다 제지 당하거나, 몇 몇 차주들은 그냥 무시하고 가기도 했습니다. 아무 긴장감도 없었습니다.


민방위 훈련, 가만히 있으라


횡단보도에도 똥색점퍼를 입고 안내봉을 든 분들이 서 계셨는데, 긴장감 제로인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민방위 훈련, 가만히 있으라


사람들이 지나가면 다가가서 움직이지 말고 가만히 있으라고 하는 듯 했는데, 말 잘 듣는 사람들은 옆에 가만히 서 있었고, 일부 사람들은 민방위 훈련을 하거나 말거나 횡단보도를 건너기도 하고 걸어다니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원래는 10분 정도 대피훈련을 했던 것 같은데, 5분쯤 지나자 차들이 지나가도 된다고 봉을 흔들어 어설프기 짝이 없는 민방위 훈련이 끝났습니다.



10여년이 지나도록 바뀌는 것이 없는 어설픈 민방위 훈련

길을 가다가 민방위 사이렌에 맞닥뜨려 대피를 한 것은 이 번이 처음은 아니었습니다. 


▶︎2008/12/15 - 운전중에 민방위 훈련이 시작되면?


8년 전, 갑자기 운전 중에 민방위 훈련이 시작되어 차를 정차시키는 것에 당황한 적이 있었습니다. 사이렌이 울리거나 말거나 사람들은 지나다니고, 차들만 못 가게 하니까 운전자들이 짜증을 부렸습니다. 긴장감은 전혀 없고, '재수없게' 걸렸다 싶었을 뿐이었죠.


몇 년 전, 감사원 앞에서 민방위 훈련에 걸렸을때가 그나마 대피훈련 같았습니다.

차를 전부 갓길로 이동시켰고, 라디오를 켜라고 하였습니다. 차 시동도 끄게 했던 것 같습니다. 운전자들은 갓길에 일렬로 차를 주차한 뒤, 차 안에서 기다리거나 인도로 나와서 서 있었습니다. 밖에 나와 있는 분들은 주로 흡연자 분들로, 이참에 담배 한 대 피우며 스트레칭을 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저는 차 안에 앉아있긴 했으나, 유사시 재빨리 차에서 내려 인도로 대피하면 될 것 같아, 다소 안심이 되었습니다. 이 날은 약소하게 나마 대피 훈련을 한 느낌이라, 민방위 훈련이 많이 달라졌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감사원 앞 뿐이었나 봅니다. 또는 그 곳에서 진행하던 분이 제대로 했을 뿐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로부터 몇 년 지난 현재의 민방위 훈련을 보니, 여전히 엉성합니다. 8년 전처럼 아무런 안내도 대책도 없이 '가만히 있으세요'라고 하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이거 왜 하나 싶고, 사람들의 시간만 잡아먹는 훈련이 지속되고 있었습니다.


국민재난안전포털(http://www.safekorea.go.kr/idsiSFK/index.jsp)에서 찾아보니, 원래 민방위 훈련은 다음과 같이 해야 된다고 합니다. 30여년 넘게 한 번도 아래처럼 제대로 해 본 적은 없지만...




가만히 있으라 공포증

어릴 적에는 어른 말씀을 듣는 것,  선생님의 지시를 따르는 것에 대해 의심을 품어 본 적이 없습니다. 어릴 적 뿐만이 아니라 서른이 넘은 지금까지도 권위자의 말이나 연장자의 말에 순응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세월호 사고에서 어른들 말을 들으며 가만히 있으라고 하여 죽은 어린 청소년들을 보고 난 뒤로는 큰 회의가 밀려왔습니다.

한국 근현대사에 무지하여 몰랐었는데, 6.25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국민여러분,  안심하십시오! 서울시민 여러분, 안심하고 서울을 지키십시오. 적은 패주하고 있습니다. 정부는 여러분과 함께 서울에 머물 것입니다. 국군의 총반격으로 적은 퇴각 중입니다." 라고 한 뒤에 자신은 부산으로 피신을 하였고, 한강 인도교는 폭파했다고 합니다.

임진왜란부터 6.25, 세월호에 이르기까지, 수장들은 자기 먼저 도망가면서 사람들에게는 가만히 있으라고 하여 말 잘 들은 사람들만 죽은 전례가 수두룩 합니다. 얼마전 지진 사태에는 이를 풍자하는 짤방도 유행했습니다.




오늘 오후 2시에도 민방위 훈련으로 지진 대피 훈련을 한다고 합니다. 어떤 곳에서는 제대로 훈련을 하기도 하겠으나, 오늘도 대부분의 지역에서는 멀뚱하니 가만히 있으며 '재수없에 민방위에 걸렸네' 라며 궁시렁대다가 10분 지나면 움직이는 형식적인 훈련이 될 것 같습니다. 그 속에서 어떤 사람은 저처럼 '무슨 일이 생기든 무조건 가만히 있으라고 하는구나. 훈련에서 이딴 식이면 실제 사태가 벌어지면 아수라겠구나, 또는 아수라를 보기도 전에 죽거나...'  하는 불안을 느끼겠지요... 이왕 할거라면 훈련은 실전처럼 제대로 대피 연습을 하면 좋겠습니다... 

무서운 것은, 제가 8년 전에 쓴 글에도 맺음말이 똑같았다는 것 입니다. 


민방위 훈련, 가만히 있으라



[생존은 셀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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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부장님: 야 뭐야? 왜 19일에 사이렌울려?
    팀원들 (아무도 모름)
    부장님: 야 근데 우린 나중에 진짜 전쟁나서 사이렌 울려도 대피 못하고 죽겠다 ㅎ
    가짜인줄알고 이러고 있을거 아냐

  2. 신제라고 생각하고 받으면 오히려 안전하다는 생각이 들 수도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