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히 저녁에 모이는 자리는 9시를 넘어 10시쯤 되어갈 때 분위기가 아주 좋은데, 그럴때면 집에서 귀가독촉전화가 옵니다. "지금 가는 중이야." "이제 버스 기다려." 하고 둘러대면서 한창 좋은 분위기에서 나오는 것이 아쉬워 밍기적대고 있노라면, 핸드폰이 불이 납니다. 잠깐 있었던 것 같아도 금세 10시 20분, 10시 30분이 됩니다. 재미있을수록 시간은 왜 이리 빨리 가는지... 그리고 그 사이 쌓여있는 부재중 전화도 엄청납니다.
무려 37통. (집에 가면 죽었다...ㅠㅠ)
지금이라도 전화를 해서 버스탔다고 해야 집에 가서 조금이라도 덜 혼날텐데, 37통이라는 숫자를 보니 벌써 분노게이지가 최고조에 달해있을 엄마의 모습이 상상되면서 도무지 용기가 나지 않습니다. 게다가 벌써 막차가 지나갔는지 버스도 안 옵니다. 택시비도 없는데, 버스 끊겨서 택시타고 가니까 택시비 들고 나와계시라고 하면, 정말 목숨을 부지하기 힘들지도 모릅니다. 이런 공포에 떨고 있는데, 다행히도 저같은 사람들을 잔뜩실은 막차가 와서 타고 집에 왔습니다.
조마조마하면서 집에 돌아오니, 평소에도 말씀을 논리정연하게 잘하는 엄마가 저를 보시자마자 초속 100단어씩을 쏟아 부으셨습니다. ㅜㅜ 그 뒤로도 늘상 조금이라도 더 놀고싶어하는 저와 10시면 집에 들어오라는 엄마와의 실랑이는 계속되었습니다.
저 뿐 아니라 많은 여자친구들이 집의 통금시간에 시달렸습니다.
그나마 저처럼 자매인 경우는 둘 다 통금이 같아서 억울할 것은 없는데, 남매이면 아들은 외박을 해도 뭐라고 안하시면서 딸은 10시 전에 집에 안 들어오면 집안이 발칵 뒤집어 지는 경우가 많아 더 억울해 했습니다. 당시에는 도무지 부모님들이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이제 성인이 되었는데, 생활을 규제하신다는 것도 불만스럽고.. (용돈받을땐 아직 어리다고 하고..)
대부분 부모님들이 아들들에게는 너그러우면서 딸에게만 엄격하신 것이 가장 불만이었습니다.
친구들과 내린 철없는 결론은, 부모님 세대가 고리타분하여 남녀차별을 한다는 것이었고,
"나는 자식 낳으면 딸이라도 똑같이 자유롭게 해줄거야." 였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통금이 사라져 10시를 넘어 늦은 시간까지 남아있어 보니, 생각처럼 즐거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마음에 맞는 사람들과 밤새도록 도란도란 이야기하는 분위기에서는 정말 즐겁지만, 부어라 마셔라 만취한 사람들과 새벽까지 남아있는 것은 즐겁기 보다 무서운 상황이 많았습니다.
늦은시간에 혼자 귀가하노라면, 인적도 드물고 인사불성이 되도록 술에 취한 사람들만 드문드문 만나게 되어 상당히 위험했습니다. 길에서 만나는 사람보다 더 위험한 것은 술버릇 나쁜 남자분이 자리에 끼어있을 때였습니다.
왜소해 보이는 남자라도 술에 취하고 감정적이 되니, 여자들에 비해 월등한 힘을 발휘했습니다. 집에 간다는 사람들을 꽉 붙잡아 팔에 멍이 들게 만들기도 하고, 괜히 혼자서 울화가 난다며 팔을 허공에 휘젓다가 주위 여자들을 치기도 하고, 집에 들여보내려고 해도 엄청난 힘으로 버티며 감춰둔 힘을 발휘하더군요. 여자 여럿이서 술 취한 남자 하나 끌어다 택시 태우는 것조차도 쉽지 않았습니다. 그런 모습을 보니, 만약 밤 늦은 시간에 여자 혼자서 음흉한(?) 남자와 있는다면, 정말 위험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제서야 부모님들이 왜 유난히 딸들의 통금에 신경쓰는 지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예전에는 딸을 낳더라도 통금없이 자유롭게 해줄거라고 했지만, 지금 생각에는 딸이 해 떨어졌는데 안들어 온다면 전화만 하는 것이 아니라 데리러 가서 차에 싣고 올지도 모르겠다 싶습니다.
그러나 딸도 분명히 반발하고, 직접 겪어보기 전에는 아무리 설명을 해줘도 잔소리로 들을겁니다. 그렇다고 딸도 직접 겪어보고 어떤 자리에 늦게까지 있어도 좋은지, 어떤 상황이 위험한지를 깨달으라고 하기에는, 위험한 상황에서 정말 험한 일이라도 겪을까봐 불안해집니다.
많은 부모님들이 딸들을 더 엄격하게 통제하시는 것은, 딸을 이해못하거나 남녀를 차별해서가 아니라...
위험할 수 있는 상황들에서 더 안전히 지켜주고 싶으셨던 마음이셨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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