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훈한 남양주 버스의 특이점
남양주 버스 특이점
남양주에 이사와서 지하철 뿐 아니라 버스에서도 특이한 광경을 많이 보게 되었습니다. 서울에서 본 적 없는 훈훈한 광경을 자주 봤는데, 제게는 무척 낯선 광경이었습니다.
어르신 다음 버스 타세요
남양주 버스는 지하철 못지 않게 간격이 상당히 깁니다. 서울에서처럼 버스 지나가도 다음 버스가 곧 오겠거니 하면서 버스를 보내면 안 됩니다. 다음 버스가 15분 후, 혹은 45분 후에 올 수도 있어요. 버스 배차 간격이 길고, 장거리 노선이 많아서인지 남양주 버스는 일반버스도 좌석버스 입니다. 좌석버스 형태이고 대체로 사람이 그리 많지 않아서, 버스에 타면 앉아 갑니다.
어느 날, 왜 인지 버스가 붐볐습니다. 다음 정거장에 다다르자, 지팡이 짚으신 할머니가 버스를 타기 위해 일어나셨습니다. 기사님은
"어르신, 지금 자리가 없어요. 이번 말고 다음 버스 타시는게 나을 것 같아요."
라고 했습니다. 저는 속으로 '미친. 다음 버스 10분도 넘게 더 기다려야되는데 이 무슨 개소리야?' 라고 생각했어요. 서울은 3분 뒤에 버스가 오고, 정말 앞문을 열 수 없을 정도로 만원이어서 다음 버스 타라고 해도 난리 나잖아요. 저는 할머니가 참지 않으실 줄 알고, 흥미진진하게 상황을 구경했습니다. 할머니는
"그래? 자리 없어? 알았어."
하시더니 얌전히 다시 버스정류장 의자로 돌아가 앉으셨습니다.
저만 이 상황이 놀랍고 신기할 뿐, 다들 아무렇지 않아 보였어요.
이 버스 사거리 가요?
어느 날 버스를 탔습니다. 한 할머니가 타시면서
"이 버스 묵현리가죠?"
라고 물으셨습니다. 묵현리는 무려 16리까지 있는 종로구 뺨치게 큰 곳입니다.
기사님 : "네, 가요."
할머니 : "거기 묵현 사거리 가죠?"
이 뭐 병. 종로 사거리 가죠 같은 질문을 하시는데 저는 어이를 상실했습니다. 아무리 어르신이라도 그렇지, 종로 사거리 가냐고 하면, 종각부터 종로6가 사이의 어느 사거리를 말하는지 알아 들을 수가 없잖아요. 그러나 이 역시 저만 불편했습니다. 버스에는 저 빼고 승객이 두 명 더 있었는데, 기사님과 힘을 합쳐 어르신께 길 설명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기사님 : "어르신, 묵현 사거리가 어디 근처 사거리에요?"
할머니 : 못 들으심.
다른 여자 손님 : "어르신~ 기사님이 어디 가시냐고 물으시네요."
할머니 : "응? 어디냐고? 거기 약국 있는데."
저 : (이 뭐병2. 종로 사거리 같은 소리에 이어 약국있는 사거리라....;;;;)
기사님 : 어르신 묵현리에서 스키장 마을 근처 가시는거에요?
할머니 : 왜 묵현리 약국있는 사거리 있잖아.
다른 여자손님 : 그 곳이 스키장 가는 쪽에 있는거요?
다른 남자손님 : 천마산 휴게소 있는데서 스키장 가는 길에 있는 쪽 맞으시죠?
이런 식으로 기사님, 다른 여자손님, 남자손님이 힘을 합쳐 할머니의 구체적인 목적지를 알아 냈고, 할머니가 버스를 제대로 타셨다는 것을 확인하자 모두 평화로워진 듯 했습니다.
기사님 마무리 멘트 : "혹시 버스 잘못 타시면 가시는 길이 더 힘드실까봐 여쭤봤어요. 맞게 잘 타셨어요. 이 버스 거기 가요."
(저 빼고 모두 평화)
스무고개 모드로 종로사거리 같은 소리에서 목적지를 알아내기 까지 꽤 오래 이야기를 했습니다. 저는 이미 열불나고 답답하고 짜증이 올라왔는데, 저 빼고 다 평화롭고 행복한 모습에 참으로 의아했습니다.
어르신 앉으세요. 아니면 설 거에요.
버스정류장에 다가가던 중, 한 할머니가 자리에서 일어나셨습니다. 그러자 기사님이 그걸 보시고 바로
기사님 : "어르신, 앉으세요. 서계시면 위험해요. 도착하시면 일어나세요."
할머니 : "시러. 이제 내릴거야."
기사님 : "안돼요. 다치시면 큰 일 나요. 안 앉으시면 여기서 설 거에요."
할머니 : 안 앉고 버티심
정말로 4차선 도로 한복판에서 달리던 버스가 멈췄습니다. 이 뭐....;;;;
그러나 이 때도 역시나 저만 울컥할 뿐, 모두 평화롭고, 심지어 다른 손님들은 할머니를 달랬습니다.
다른 손님 : "어르신 다치실까봐 그래요. 어서 앉으세요~"
할머니 : 일어났다 다시 앉을라면 을매나 힘든데
다른 손님들 : 부축해서 어르신 앉혀드림
버스 정류장까지 몇 백 미터도 안 되는 상황이었는데, 결국 버스가 멈추고 할머니는 낑차하시며 앉으시고, 다시 버스가 달려 정류장에 도착했습니다.
다른 손님들 : 아까 앉혀드린 할머니 부축해서 일으켜드림
저는 이 상황이 훈훈하기도 하면서 어처구니 없었는데, 저 빼고 다 평화로운 것을 보니 특이한 일이 아닌 듯 했습니다.
어르신들이 많은 동네이고, 서울보다는 승객이 적으니 버스 기사님들이 조금 더 아들처럼 어르신들을 보살피신다는 느낌도 들었습니다. 이 와중에 저 혼자 답답증을 느끼며 짜증이 올라오는 것을 보며, 이런 면은 안 좋은 서울사람 특성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서울 사람 특성이 아니라 그냥 제가 성질이 급한 것일 수도 있고요. 저만 빼고 모두 평화로운 분들을 보면서, 버스 쪼금 빨리 간다고 해봤자 몇 분 차이도 안 나는데, 저는 그 몇 분을 왜 못 견디는지 제 자신을 돌아보게 되기도 했습니다.
그냥 타세요.
제가 아니라 다른 분들 배려하실 땐 몰랐는데, 저도 배려를 받았습니다. 3~40분 만에 오는 광역직행버스를 기다렸다가 올라탔는데, 카드를 놓고 온 겁니다. 다시 집에 갔다 오면, 다음 버스 3~40분 후에 오니 일정이 완전히 망하는 각이었습니다. 그런데 아저씨는 지갑에서 카드 찾다가 버스에서 내리려는 저를 부르셔서 그냥 태워 주셨습니다. 너무나 감사하면서도 어찌할 바를 모르고 쭈볏대고 서 있었더니
"어서 타요. 또 탈 거 잖아요. 빨리 타요."
라며 매일 보는 사람 대하듯 저를 태워주셨어요. 사실은 저는 광역직행버스를 어쩌다 한 번 타는거라 더 죄송했는데, 나중에 보니 그냥 제 맘 편하게 타라고 하신 말씀 같았습니다.
그냥 태워주신 기사님 덕분에 굉장히 감사하면서도 어찌할 바를 몰라 안절부절 했습니다. 그러나 그날 저녁, 드라마 한 장면 처럼 그 기사님이 운전하는 그 버스를 다시 타게 되어, 못 드렸던 요금도 내고, 기사님 드리려고 샀던 선물도 전해 드릴 수 있었습니다.
훈훈한 장면들을 보면 여유와 사람 사는 향이 나는 곳 같습니다.
2년 좀 넘게 지냈으나, 솔직히 아직도 이런 훈훈한 느릿함에 빠르게 조급증이 올라옵니다. 저도 훈훈한 풍경 볼 때 울컥하지 않고, 같이 훈훈함만 느끼도록 변했으면 좋겠습니다.